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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대한민국장) · 의사

유상규

Yu Sang-gyu 劉相奎
1897. 11. 10.(평안남도 강계군) ~ 1936. 7. 18.

임시정부 도산의 비서 경성의전 강사·민중보건 헌신

1897년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면 동부리에서 태어났고, 기독교인으로 태허(太虛)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신문과 잡지에 27편, 
총 46회의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1908년 강계군에서 기독교계 명신소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고 서울로 가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참여하였고 결국 퇴학을 당하게 되었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비서로 활동하였습니다. 1919년 11월에는 전용영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계군 조사원으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조사원은 국내 각 지역 유력자, 재산가, 학교와 종교 실태 등을 조사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였습니다.

1920년 2월 2일 흥사단 입단 문답 후 예비 단우가 되었고, 9월 9일 흥사단에 입단하였고, 상하이에 있는 동안에도 학업을 위해 한벽예학교 상과를 다녔다.

1923년 임시정부 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자, 안창호가 국내로 돌아가 의학 공부를 계속할 것을 권유하였고 상하이를 떠났습니다. 국내에 돌아와 흥사단의 국내 지부로서의 성격을 지닌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에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5년 12월 이윤재를 수양동맹회에 가입시키고, 1926년 1월에는 수양동맹회와 평양에서 조직된 동우구락부가 통합하여 수양동우회가 결성되었습니다. 그 해 4월 4일 이광수의 집에서 조병옥·이윤재 등과 함께 주의 강령을 내외에 선전하고 조직의 확대 강화를 위해 기관지 『동광)』을 발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창간호는 5월에 출간되었고, 태허라는 필명으로 일본에서의 노동체험을 담은 「방랑의 일편」을 연재하였습니다.

1927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 외과 부수,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 교실 조수와 강사로 활동하였습니다. 1930년 2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의사협회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맡아 총회를 주재하였고, 서무부 간사에 선임되어 동우회에서는 심사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32년 1월 동우회 경성지방 사업설계위원, 1월 29일 동우회 평양지회 수석위원, 11월 동광사 이사에 선임되었다.

의사로서의 삶과 민족의식 고취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 7월 18일 오전 2시 경성의학전문학교 병원에서 단독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여 7월 20일 안창호의 주관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정에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를 잇는 일.
유상규
1897
  •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면 동부리 출생
1916
  • 3월 경신학교 졸업,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
1919
  • 3·1 운동 참여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상해로 망명
  • 임시정부 조사원으로 활동하며 평북 강계 지역 책임자로 임명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근무
1920
  •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도산 안창호의 비서로 활동,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遠東支部)에 가입
1924
  • 안창호의 학업 권고로 귀국
1925
  • 경성의학전문학교 복학
1926
  •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의 통합, 수양동우회 조직
1927
  •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동 부속병원 외과의사 및 경성의전 강사
1930
  • ‘조선의사협회’ 창립, 『동광(東光)』과 『신동아』 등에 ‘태허(太虛)’라는 필명으로 많은 글 기고
1936
  • 7월 18일 별세, 망우리공동묘지(현 망우역사문화공원) 영면
1990
  •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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