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흔적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이곳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픔과 기억, 그리고 보존의 노력들이 이어지며 오늘을 만들어왔습니다.
흘러간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공간 속에 조용히 남아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발자취는 과거를 넘어, 앞으로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시작입니다.
MANG-U History & Culture Park
조선시대
망우리(忘憂里) 지명의 유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현재의 건원릉 자리를 친히 답사하고 후에 떠나게 될 경우를 그곳을 자신의 능지(陵地)로 결정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리 고개에 올라 ‘내가 이 땅을 얻었으니 근심을 잊을 수 있겠다’라고 경탄한 데서 ‘망우리(忘憂里)’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이러한 지명유래는 『수종실록』, 『승정원일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12~1932
일제강점기, 화장장과 공동묘지의 등장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장례문화는 땅에 시신을 묻는 매장문화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정한 공동묘지 외에는 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공동묘지 조성을 위해 경성부는 1920년대 전후로 서울의 동서남북(신당리, 아현리, 이태원, 수철리)에 부립공동묘지를 설치하였다.
1933
망우리공동묘지의 시작
서울 동서남북에 있던 공동묘지의 터가 부족해지자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를 조성하였다. 경성부는 망우리 일대 약 75만 평을 매입하고 그 중 약 52만 평을 묘역으로 조성하도록 하였다.
그 계획에 따라 1933년 6월 10일 망우리공동묘지 시대가 열렸다.
1950~1953
한국전쟁의 상처까지 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전쟁의 상처 속에서 가매장된 시신이 시내에 묻혀 있었다.
서울시는 시내 곳곳에 묻혀 있는 시신을 망우리공동묘지로 옮겨 이장하였다.
망우리공동묘지는 그렇게 전쟁으로 생긴 상처까지 보듬었다.
1973
격동의 근현대사 속 안식처로 자리매김
1933년 망우리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40년 동안 묘지 47,700여 기로 가득차면서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 전쟁기 그리고 산업화 시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추석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성묘객으로 가득했다. 1973년 더 이상 묘지로 쓸 공간이 없어지면서 공동묘지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1990
꽉 차 있던 수만 개의 묘지
1977년 망우리공동묘지에서 망우묘지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1980년대 이후로도 묘지를 찾는 가족과 후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1990년대 망우리공원에 묻힌 위인들의 업적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1997년부터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 15명 위인의 묘역 주변에 주묘비가 세워졌다. 1998년 망우리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21
시민과 역사가 호흡하는 공간으로
민둥산에 울창한 숲이 자라나는 것처럼 망우리공원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조상의 묘를 찾던 묘지에서 시민들이 운동과 산책, 여가를 즐기는 힐링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고, 2016년 망우리 인문학길 사잇길 2개 코스가 조성되며 근현대인문학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2022 ~
대한민국 대표 역사문화 명소로 도약
2022년 4월 1일 복합문화공간인 중랑망우공간이 개관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무료 셔틀버스 운행과 무장애 보행로 조성, 순환산책로 등 기반시설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공원 환경과 접근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와 함께 문화 인프라를 확충하고 다양한 전시·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 결과, 망우역사문화공원은 단순한 추모 공간을 넘어 역사·문화·예술·교육이 공존하는 대한민국 대표 역사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제는 미래 세대와 함께하는 열린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위젯 샘플 선택.
썸네일 없음
썸네일 없음
썸네일 없음
JLS_2060_1_6
이메일 무단수집 거부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