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묘역

Home주요묘역
  • 공원 내 인물
  • 이달의 인물
  • 공원 내 기념물

공원 내 인물

위창 오세창
대통령장
1864. 7. 15.(서울) ~ 1953. 4. 16.
“근대 최고의 서화가”
일찍이 언론인으로 개화에 앞장 섰으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우리나라 옛 서화를 수집하고 정리한 공이 큼.
  • 1864
    7월 15일 서울 을지로에서 출생
  • 1875
    10월 우봉이씨와 결혼
  • 1883
    9월 장남 일찬 출생
  • 1884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구속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남
  • 1886
    박문국 주사로 입사. 한성주보 기자
  • 1895
    공무아문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 1898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 망명. 천도교 입교
  • 1906
    손병희, 권동진과 귀국. 만세보 사장 취임
  • 1909
    대한민보 사장 취임
  • 1911
    서화미술회 개설, 회원 참여
  • 1916
    한용운, 위창방문기 매일신보에 연재
  • 1917
    『근역서화징』 완성(출간은 1928년)
  • 1919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
  • 1921
    11월 23일 가출옥(2년 8월 복역). 서화협회보 창간
  • 1925
    3월 보성학교 제5회 협전에 서예 작품 출품, 이후 11회 협전까지 지속적으로 출품
  • 1945
    서울신문사 명예사장. 건준 고문,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고문
  • 1946
    8월 대한제국 국새를 민족대표로 인수
  • 1953
    한국전쟁 중 대구 피난살이 중 별세

1864년 서울 출생으로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가·수집가였던 오경석의 장남이다. 20세에 역관이 되었다가, 1886년 박문국 주사로서 한성주보 기자를 겸하였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됐고,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했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1년간 체류했다. 1898년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던 중에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귀국 후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을 역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53년에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했다. 광복 후 서울신문사 명예사장·민주의원·대한민국 촉성국민회장·전국애국단체총 연합회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중 피난지 대구에서 사망하여 사회장이 거행됐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부친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을 편술했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 정리한 사전이다. 그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 자료를 모아 <근역인수>를 집성했으며,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 <근역화휘>등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 고전, 갑골문형태의 구성적인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또한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에 있어서도 당대의 일인자였다.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의 두전을 비롯한 기념비 글씨도 전국 곳곳에 많이 남겼다.  

문화재 수집에 일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이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준 많은 인연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외종 형 월탄 박종화 시인과 휘문고보 시절 스승인 춘곡 고희동 화백, 그리고 오세창의 역할이 매우 컸다. 특히 오세창은 처음 전형필을 만난 자리에서 이 젊은이의 그릇을 알아보고 오늘날 한국 문화재의 상징이 된 간송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오세창이 전형필에게 아호 ‘간송’을 지어줄 당시 “젊은 자네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들어오는 순간, 깊은 산 속에서 흐르는 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래서 산골물 간(澗) 자! 그리고 ‘논어 자한 편’에 ‘세한연후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말이 나오는데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뜻이지. 추사 선생께서 선비의 지조와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주면서 인용한 문장이지. 자네에게 이 문장에 있는 소나무 송(松) 자를 넣어 ‘간송’을 주지. 마음에 드는가?”
간송이 사설 박물관을 세우게 된 배경에는 오세창의 당부가 있었다. “3·1만세 운동 때 감옥에도 다녀오니 남은 재산이 별로 없더군. 생활이 힘들 때마다 선친이 남겨주신 서화를 몇 점 처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네. 그러니 자네도 힘들게 수장한 물건을 절대 다시 내놓지 않아도 될 만큼만 모으게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네가 오랫동안 애써서 모은 수장품이 자네 스스로 또는 자손들에 의해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니 내 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게." 오세창의 당부가 간송에게 ‘수집 이후 보존’ 방법을 고민하게 하였고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로 사설 박물관을 세울 결심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간송의 눈을 뜨게 하고 박물관 설립 결심까지 하게 해서 ‘금동 계미명 삼존불입상’ ‘금동삼존불감’ 등의 성보문화재를 잃어버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현재 서울 봉은사 법왕루에 걸려 있는 ‘선종종찰 대도량’과 경북 구미 도리사 ‘태조선원’·경남 진주 ‘비봉산 의곡사’ 현판을 썼으며 전남 승주 송광사의 ‘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에서는 스스로를 ‘위창거사’라 칭했다. 망우리공원 정상부에 자리한 오세창의 묘소는 인근에 문일평, 방정환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의 무덤에 서예가답게 대단한 묘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비석의 앞면은 일본에서 추사의 세한도를 가져온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이 글을 썼고, 뒷면은 명문 안동김씨 집안인 여초 김응현이 쓴 글씨가 보인다. 묘비석 하나만 봐도 오세창이 얼마나 대단한 서예가인지 알 수 있을 정도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