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6세경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892년 부친의 뜻에 따라 전정숙과 혼인하였다. 이후 동리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4년경 속세와 인연을 끊고 승려가 되었고 불교개혁을 단순한 불교계의 개혁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개혁과 연관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노년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창씨개명 반대와 학병 출전 반대운동을 펼쳐나갔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에서 입적하였다.
1908년 범어사와 지리산 일대 사찰을 돌며 불교 대중화와 개혁운동에 노력하였다. 1911년 1월 15일 박한영 등과 함께 호남 일대에서 기치를 내세우고 순천 송광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1911년 만주에서 박은식, 이시영, 윤세복 등 민족지도자들을 만나 조국이 처한 문제를 협의하였다. 또한 불교계의 혁신과 불교의 대중화 운동에도 주력하였고 타락하고 변질된 불교의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913년 불교서관에서 발행한 『조선불교유신론』은 그와 같은 필요성에서 저술한 것이다.
1919년 1월 말 경, 최린을 만나 시국담을 나누다가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고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는 등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후 최린은 물론 오세창 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수시로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3월 1일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런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을 하는 책임이 막중하니 앞으로 공동 협심하여 독립을 이뤄내자”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1931년에는 불교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대중화와 민중계몽운동을 펼쳤다. 1926년 발표한 「님의 침묵」으로 최초의 근대시인, 최고의 시민문인, 저항시인이 되었다. 1930년대 후반기에는 「후회」, 「철혈미인」, 「박명」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