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이고 할아버지는 평북 강계의 이름난 한의사로 상인 조직인 상무회 회장을 지낸 유신진이고, 아버지는 유영성이며, 어머니는 청주 이씨이다.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유상우는 약종상을 하면서 임시 정부 연통제의 강계군 참사와 교통국 조사원을 지냈으며, 동생 유상하는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나와 조선건축기술단 상무를 역임 하였다. 1927년 5월 5일 강계 유지로 명신학교를 세운 이학면의 둘째 딸 이애신과 혼인했다. 1916년 3월 경신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의사로서 경성의전의 강사로 근무 하면서 후배 양성과 환자치료에 전념 하였으며,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동아일보사 등 여러 출판물에 대중의 보건위생 계몽과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참석해 조선 민중의 의학적 계몽 활동을 벌였다.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외과 강사로 근무 중 환자를 치료하다 세균이 전염되어 순직했다. 그의 장례는 마침 대전에서 출옥하고 국내에 체류하던 안창호가 주관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정에서 치뤄지고 망우리 가족묘지에 묻혔다.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 후 학교를 중단하고, 1919년 11월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에서 국내에 있는 유력 재산가, 학교 및 종교계 등을 조사하여 독립 운동의 자료로 삼기 위해 조직한 임시 정부 조사원의 평북 강계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2월에는 상해 임시정부 요인이던 안창호의 비서로 활약하였고, 그해 2월 22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조직된 흥사단 원동 지부에 가입하였으며, 유기준을 흥사단에 가입시키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인재가 필요한 민족이니 고국에 돌아가 학업을 마치라."는 안창호의 권고로 1924년 귀국하여 이듬해 복학하였고 학업을 계속하면서도 동우회 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상해 망명으로 말미암아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입학 동기들보다 7년을 늦게 졸업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의사협회 창설을 주도하였고 동우회 잡지 『동광』은 물론, 『신동아』 등에 ‘태허 (太虛)’라는 필명으로 많은 글을 실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수학중인 1926년1월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의 통합에 힘써 동우회를 조직하면서 동우회 초대 심사부 임원이 되었고 의사면허 취득 후에도 1929년 동우회 심사부 임원으로 재임명 활약을 지속하였다. 1930년 11월 동우회기관지 동광사 임원으로서 동광지 속간을 이루고 1931년8월 동우회 하계수양대회를 추진하여 대동강변에서 개최하고 수양동우회 강령선전과 발전을 위해 청년개척군 조직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의전에서 교육과 치료 및 국민 보건위생계몽에 몸 바치면서도 흥사단 운동 확장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