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함남 단천에서 설태희의 5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916년 원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서울중앙학교에 입학했다가 3·1운동에 관여하여 퇴학당한 후 니혼(日本)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중앙학교 교사였던 송진우와의 인연으로 1922년 동아일보(사회부기자)에 들어가 주일특파원·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돌아와 서울신문 고문을 지내고 심장병으로 병석에 누웠다가 1954년 별세하여 망우리공원 안장되었다. 그의 묘 옆으로 부친 설태희와 형 설원식의 묘도 함께 있다.
그의 언론계 동료이자 문인이었던 주요한(1900-1979)은 “소오는 본질적으로 언론인이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현대적 감각의 문장가였으며 수필가였고 직업적인 작가, 정치적인 문제들을 격조있게 논평한 평론가였다(인물론-소오 설의식, 1975년 8월)”고 회고한 바 있다. 또한 설의식에 대해 “생활과 직업을 분별하지 않고 직업적으로 몰입하는 부지런한 성격”이었으며, “생활에 충실하고 자기 글을 아끼는 사람” 이라고 평가했다.
1926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헐려 짓는 광화문>은 설의식의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일제강점기 현실에 대한 비판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칼럼으로 민족혼의 상징인 광화문이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속수무책으로 헐려지는 참담함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1929년 주일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단평란을 집필했고, 1931년 잡지 <신동아>를 창간할 때에는 편집국장 대리로 있으면서 제작을 총괄하였다. 그는 논지가 선명한 논설과 재치있는 시평으로 유명하였으며 ‘횡설수설’ 칼럼은 동아일보의 상징이 되었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단으로 참가한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소식을 전하면서 손기정 선수 유니폼의 일장기를 지워서 실은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당하고 그는 편집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1945년 광복 후 동아일보에 복귀하여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으나 송진우가 타계하자 그도 퇴사하여 1947년에 새한민보를 창간하였다.
1948년 4월 ‘문화인 108인 연서 남북회담 지지성명서’를 기초하고, 6월에는 언론협회를 발족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3년 충무공기념사업회 상무이사로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하는 등 충무공 연구와 강의에 매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