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는 1889년 황해도 해주에서 박계근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까지 한문을 배우고, 황해도 해주 의창학교 보통과와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평양 숭실중학교로 진학하여 학업을마친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 수학하고 중퇴하였다. 이후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5세 무렵 기독교인이 되었다. 일찍이 해주군 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에는 중앙예배당에서 ‘지성의 감동력’이라는 주제로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미국인 목사 베커(Becker, A. L.)의 지도 감독으로 경성에서 유학하는 해주 출신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건립을 추진하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친일 행적으로 인해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석방되고 육군정훈 학교에서의 강의 외로는 일체의 사회활동을 접고 지내다가 과거 수형 때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1951년 별세 후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1916년 6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오늘의 대한기독교청년회 연맹, 약칭 YMCA)의 회원 확대 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함흥 소재 기독교계 보통학교인 영신학교의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1916년 10월 장낙도, 유양호 등 중앙교회 목사와 함께 중류 이하 자제를 대상으로 하여 기독교적 민족교육을 표방한 중앙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18년 6월 감리교 창의문밖 교회 전도사가 되었고, 9월 조선기독교청년회 회원부 간사로 취임하였다. 1919년 2월 22일 손병희, 최남선, 이승훈 등이 한국의 독립을 내외에 선언하기로 결의 하자 기독교 민족주의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참여를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YMCA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기독교인 대표의 섭외와 청년 학생들의 동원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약 3년간 옥고를 겪고 1921년 출옥한 후 고양군 숭인면 용두리 교회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1922년 1월 김명식 등이 주도한 신생활사 창립에 참여하였다. 신생활사에 자본금 1만 5천원을 기탁하여 사장으로 취임하고 잡지『신생활』 발간을 이끌었다. 기독교 세력과 초기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지닌 잡지 『신생활』은 사회주의 사상을 비롯한 여타 신사상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1월 ‘신생활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량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신생활』 11호가 러시아혁명 5주년기념호로 발행된 것이 빌미가 되었다. 이로 인해 잡지는 발행금지 처분을 당하였다. 출옥한 뒤 독립계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3월 도덕적 인격수양과 경제적 실력양성을 표방하며 조직된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7년 1월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내 출판부장을 지냈고, 같은 시기 신간회 동경지회 간부(대표회원)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동회(同會) 회보 편집위원을 담당하였으며, 10월 중앙상무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8년 4월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0년 조선고아구제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여러 잡지에 계몽적 성격의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경부터 전향하여 일제 정책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11월 친일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일선융합(日鮮融合)을 표방하며 조직한 시중회(時中會)의 발기인 및 이사로 1937년 10월까지 활동하였고 1939년 1월 ‘내선일체’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동양지광사를 창설하여 기관지 『동양지광』(일본어판)을 발행하였다. 1945년 5월 폐간할 때까지 동 잡지사의 사장,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