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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 인물

송촌 지석영
1855. 5. 15.(서울 낙원동) ~ 1935. 2. 1.
“전염병 퇴치에 앞장선 예방의학자”
조선 후기의 의사·문신·국문학자이며 최초로 종두법을 도입하여 천연두 예방에 기여함.
의학교육사업과 한글 보급 및 연구에도 힘씀.
  • 1855
    서울 종로 출생
  • 1876
    스승 박영선에게 『종두귀감』을 받아 읽음
  • 1879
    충북 청주 덕산면에서 주민 40여명에게 우두 접종
  • 1880
    일본에서 두묘 제조법 학습
  • 1883
    문과 급제.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 역임
  • 1885
    『우두신설』 저술
  • 1894
    형조참의 제수
  • 1895
    동래부관찰사
  • 1899
    경성의학교 창립, 초대 교장
  • 1905
    ‘신정국문’ 6개조 상소
  • 1908
    대한의원 의육부 학감. 국문연구소 위원
  • 1909
    『자전석요』저술
  • 1935
    타계

185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한의사였던 지익룡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한의사 박영선에게 한문과 의학을 배웠다. 스승 박영선이 일본 수신사 일행의 의사로 일본 방문 시에 입수한 『종두귀감』을 접하고 서양 의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개화사상가이자 시인인 강위(姜瑋)의 밑에서 유길준과 함께 공부했다. 중국의 서양의학번역서들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E. 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牛痘接種法, 천연두예방법)에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개화사상가로서 신의학의 도입에 앞장섰으며, 또한 초기 국문연구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었다. 의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그의 과학적 탐구는 특히 우두법의 도입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두창, 마마, 손님이라고도 불리던 천연두는 사망률이 높을 뿐 아니라 생명을 구하더라도 곰보가 되는경우가 많은 무서운 질병이었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은 전염의 원인과 치료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우두법은 이미 실학자였던 정약용과 박제가에 의해 연구되기는 했지만 의학적으로 의미있는 우두법을 실행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지석영은 우두법에 대한 이론뿐 아니라 실제 시술법을 배워서 이를 시행하고, 우두법을 소개하는 책을 저술하여 널리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한일합병 이전에 국문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문연구소를 설치하도록 하여, 우리말 문법 체계를 수립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1876년(고종 13)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한의사 박영선이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귀감〉을 얻어 가지고 귀국하자 이를 전수받았다. 1879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자, 그해 10월 부산으로 내려가 일본이 새운 제생의원에 찾아가 종두법을 배웠다. 12월에 병원을 떠나면서 세 병의 두묘(천연두 예방용 백신)와 종두침(천연두 예방 접종용침)을 얻어 귀경 길에 처가인 충주 덕산면에 들러 두 살 된 처남에게 종두를 실시하여 성공하자 그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했다.
1880년 5월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 내무성 소속 위생국 우두종계소장 기쿠치에게 백신의 제조와 저장법, 백신용 송아지를 기르고 백신을 채집하는 법 등을 배우고 백신도 얻어 귀국했다. 귀국 후 일본 공사관 소속의 의사와 접촉하면서 우두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지석영의 종두법이 개화 운동이라 무당과 수구파에 의해 종두장이 불타 버리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해 10월 서양 의학의 도입과 이용후생에 유익한 서적 및 기계의 도입 등을 주장하는 상소를 조정에 올렸다. 1883년 여름 전라도암행어사로 내려갔던 박영교의 요청으로 전주에 우두국(천연두 백신 접종소)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으며, 충청우도암행어사 이용호의 요청으로 공주에도 우두국을 설치했다. 1883년 3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을 지냈다. 1885년에는 그동안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의학서인〈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전라남도 강진 신지도로 유배되자 그곳에서 〈중맥설(重麥說)〉과 〈신학신설〉을 저술했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堂)을 설립하고 접종을 실시했다. 1894년에는 갑오개혁으로 내무아문 내에 위생국이 설치되어 종두를 관장하게 되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지석영은 형조참의, 승지, 한성부윤, 동래부사 등에 중용되어 개화정책에 참여하였고, 1985년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접종을 받도록 하는 종두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 수구파 정권이 들어서자 개화파 지석영은 한직으로 물러나고,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까닭에 이듬해 황해도 풍천으로 유배되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7월 15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정부에 서양의학을 교육하는 학교 설립을 요구하였고, 지석영도 11월에 상소를 올려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1899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의학교가 설립되고, 지석영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관립 의학교는 후에 대한의원, 경성의전을 거쳐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많은 업적을 쌓았으나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대한의원(원장은 일본인) 학감을 사임한 뒤, 두문불출 조용히 독서와 저술로 보내다가1914년 유유당이라는 소아과의원을 열어 봉사를 시작했고, 1915년에는 전선의생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한글에 조예가 깊던 강위의 영향으로 일찍이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을 가졌다. 국문학교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으며, 의학교 학생 모집 때도 국문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다. 한편 그는 상소를 올려 “세종대왕 창체 국문이 표시하지 못하는 음이 없고 매우 배우기 쉬운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그저 민간에 방임한 결과 형식이 정립되지 못했 으니 국문을 새로 개정하여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하였다. 정부는 지석영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신정국문〉을 공표하였다. 또한 학교의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고 그연구위원이 되었으며, 1909년에는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를 간행했다. 그해 4월 통감부가 의학교육을 일본어로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즉각 의견서를 제출하여 반대했다. 한편 국채보상연합회 부소장, 대한자강회 평의원, 기호흥학회 부회장 등으로 사회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팔괘장 등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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