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묘역
- 공원 내 인물
- 이달의 인물
- 공원 내 기념물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이희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당시 미술교사였던 임용련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독립전과 자유전에 출품하여 신인으로 각광 받았다. 1952년에는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고 홀로 남아 부두노동을 하다가 서울로 돌아와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다가 그해 9월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주요 작품으로는 〈서귀포의 환상〉〈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황소〉〈달과 까마귀〉<싸우는 소> <흰소><투계> 등이 있다.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했다. 1943년에도 역시 같은 협회전에서 태양상을 수상했다. 1943년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일본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원산에 머물렀다.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신사실파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월남 이후에는 부산, 제주, 통영, 진주,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고,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 보낸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유랑 생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깊은 좌절과 자괴감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져 정신분열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평탄치 않았던 생애로 인해 ‘비운의 화가’로 전설처럼 기억되고 있다. 그는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고독과 절망을 그림으로 해소하려는 듯 격렬한 터치로 소를 그렸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도원과 같은 환상적인 이상세계를 화폭에 담았다. 소 그림은 1930년대부터 이중섭의 작품에 등장하는데, 흰 소를 자주 그린 것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킨 두 마리 소의 대결에서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준다. 또한 그에게 소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갈등과 고통, 절망, 분노를 표현하고, 때로는 희망과 의지, 힘을 상징한다. 또한 소와 아이가 어울려 노는 장면을 통해 특유의 해학적인 웃음과 인간적인 정감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의 예술 특징은 자유분방한 선묘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가 그린 소 그림은 한마디로 선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격렬한 소의 동세를 표현한 것은 그의 거침없는 필선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담뱃갑 속에 든 은 종이 위에 송곳이나 나무 펜으로 아이들이 물고기와 어우러져 노는 장면이나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그 경쾌하고 유연한 필선에서 살아있는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은지화는 그의 선묘화의 특성이 발현되고 독자적으로 창안된 정수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의 은지화 3점은 은지 속에 담긴 내용과 독특한 재료의 개발이라는 점에서 고유성을 인정받아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중섭 묘에는 큰 소나무와 함께 후배 차근호 작가가 세운 비석이 서 있고 비석 안에는 어린 두 아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