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묘역

Home주요묘역
  • 공원 내 인물
  • 이달의 인물
  • 공원 내 기념물

공원 내 인물

계용묵
1904. 9. 8.(평안북도 서천군 남면) ~ 1961. 8. 9.
“「백치 아다다」의 작가”
소설가로 1935년에 대표작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음. 주로 소시민이나 소외자에 대한 관심, 인간성 회복에 관점을 둔 작품을 발표함.
  • 1904
    9월 8일 평안북도 선천군 남면에서 출생(조부에게 한문 수학)
  • 1919
    고향의 삼봉공립보통소학교 졸업 후 서당에서 공부(재학 중 안정옥과 혼인)
    1924년 휘문고보 입학
  • 1925
    《생장》에 시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로 현상문예 당선. 《조광》 2월호에 단편소설 「인두지주」발표
  • 1928
    도일. 도요대학에서 동양학 전공 중 집안 파산으로 귀국
  • 1935
    《조선문단》에 「백치 아다다」를 발표
  • 1938
    조선일보 출판부 입사
  • 1943
    일본 천황 불경죄로 2개월간 수감
  • 1945
    정비석과 《조선》 창간
  • 1948
    김억과 출판사 「수선사」설립
  • 1949
    단행본 『별을 헨다』 출간(수선사)
  • 1952
    1952~1954년 1.4후퇴 후 제주도에 머물면서 월간 《신문화》 창간(문학도 양성)
  • 1954
    10월 소설집 『별을 헨다』 출간(희문화사)
  • 1956
    11월 20일 영화 「백치아다다」 시사회 개최
  • 1957
    12월 세계문학론사전 출간(희문화사)
  • 1958
    11월 톨스토이 「부활」 번역 출간, 릴케의 「말테의 수기」 번역 출간(보문각)
  • 1961
    8월 9일 《현대문학》에 「설수집」 연재 중 위암으로 타계
평안북도 선천군 남면 삼성동 군현리 706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안(遂安), 아버지는 항교(恒敎) 어머니는 죽산 박씨이며 1남 3녀 중 장남이다. 1918년 향리의 삼봉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순흥안씨 안정옥과 결혼했다. 1919년 졸업 후 서당에서 공부했다. 그가 문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보통 학교 시절인 1920년 소년 잡지 새소리의 문예 공모에 시 「글방이 깨어져」를 응모해 2등으로 입선하고 나서부터의 일이다. 할아버지 몰래 상경하여 중동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신문학을 반대하는 할아버지에 의하여 귀향해야만 했다.
서울에서는 김억과 같은 하숙집에 숙식했다. 이 때 염상섭, 남궁벽, 김동인 등과 교우 하며 문학에 더욱 뜻을 두었다.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 동양학과에서 공부하고 야간에는 정칙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1931년 집안이 파산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은 「상환」으로 1925년 조선문단에 실렸다. 이때 작품을 심사하고 추천한 작가는 서해 최학송이었다. 그는 이어 조선지광에 「인두지주(人頭蜘)」를 발표하고, 1927년 조선문단에 응모한 단편 「최서방」이 재차 당선되어 문인으로서의 앞날을 확고히 했다. 두 작가는 티격태격 부딪치는 라이벌 관계로 알려졌다. 서해가 1932년 애석하게 먼저 생을 마감하자, 유족을 돕는 일과 서해의 문학을 정립하는데 힘을 다해 우정을 발휘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내 두 분의 묘지도 약100m 떨어져 있다
1935년경부터 5~6년 동안 심장병과 위장 질환에 시달린 뒤 좀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오래도록 병약한 상태로 살던 그는 1960년에 이르러서는 너무 쇠약해져서 수술을 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며칠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신이 지배하는 것이다”라는 한 마디를 가족에게 남기고 1961년 8월 9일에 서울 성북구 정릉동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1935년 정비석, 석인해 등과 함께 동인지 해조(海潮)의 발간을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1938년 조선일보사 등에서 근무했다. 1943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일왕에 대한 불경 혐의로 검거되어 2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1944년 그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고향 선천으로 돌아갔다. 해방과 함께 일제의 감시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자 서울로 올라와 조선출판사에서 소설집 백치 아다다를 펴냈다. 이어 정비석과 함께 1945년 12월 종합지 대조를 창간하나 3호까지 내고 종간한다. 다시 창작 활동에 나선 그는 1946년에 「금단」과 「인간적」을 발표하고, 1949년에는 분단의 아픔을 그린「별을 헨다」를 비롯해 「바람은 그냥 불고」·「치마」·「일만오천환」· 「짐」·「이불」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1948년 김억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를 차린 그는 1950년 여기서 별을 헨다를 간행하고, 「물매미」·「수업료」· 「거울」·「희롱」 등을 발표했다. 1952년 그는 월간지 신문화를 창간하지만 역시 3호까지 내고 종간했다. 
그는 「백치 아다다」, 「인두주지」, 「별을 헨다」 등 40여편의 소설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엿보인다. 그 중 대표작「백치 아다다」(1935)에 이르러 초기 작품에서 보였던 경향성을 벗어나 소박하고 일상적인 삶의 국면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소박한 행복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의 좌절’을 연민 섞인 관조적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생의 비애와 삶의 질곡을 담담하게 성찰했다. 그의 소설은 궁극적으로 물질에 대해 욕망에 의해 상실된 인간성 회복에 역점을 두었다. 작품집으로 단편집 병풍에 그린 닭이·백치 아다다·별을 헨다 외에 한 권의 수필집 상아탑등이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