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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 인물

가수 차중락
1942. 3. 2.(서울 신당동) ~ 1968. 11. 10.
“60년대 가요계의 아이돌”
60년대 가요계의 우상이요, 오빠의 원조. 대중의 감성을 뒤흔드는 보이스로 각광을 받은 60년대 대표 대중가요 가수
  • 1942
    서울 출생
  • 1954
    장충초 졸업, 경복중 입학
  • 1957
    경복중 졸업, 경복고 입학
  • 1961
    경복고 졸업(친구의 자살로 충격받아 1년 유급)
  • 1961
    한양대 연극영화과 입학
  • 1962
    한양대 연극영화과 중퇴
  • 1963
    키보이스 밴드에서 보컬 활동
  • 1966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발표
  • 1967
    「사랑의 종말」발표, MBC 10대가수상 신인상, TBC 신인가수상 수상
  • 1968
    11월 10일 별세
  • 1969
    2월 16일 망우리 묘에 추모비 제막

1942년 아버지인 차준달과 어머니 안소순의 셋째 아들로 신당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위로부터 중경, 중덕, 중락, 중광, 중용, 선희, 중선, 중화, 중배, 순영, 선미의 8남 3녀이다. 부친은 큰 인쇄소를 경영하였고, 부친은 보성전문 마라톤 선수, 모친은 경기여고 단거리 선수였다. 1950~60년대의 대표적 시인인 김수영은 큰 이모의 장남이었다. 맏형 중경을 비롯해 남자형제는 역도, 야구, 육상 등 각 분야에서 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충초등학교를 나온 중락은 경복중고를 다니며 육상선수로 활약하였고, 대학에 들어 와서는 보디빌딩을 하여 대학 1학년 때 1961년 미스터코리아에 2위에 입상하기도 하였다. 차중락의 원래 장래 희망은 영화감독이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나, 20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를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일본행 배를 탔으나 밀항사기에 걸려 실패한다. 

이후 서울에 돌아와 사촌형 차도균의 권유로 1963년 10월에 키보이스 밴드에 합류하여 보컬로 활약한다.  하지만 매니지먼트 회사도 매니저도 없던 시절, 세인의 욕망 앞에 그대로 노출된 몸은 지쳐만 갔고, 결국 1968년 9월 29일, 청량리 동보극장에서 공연 중 돌연 쓰러진 차중락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낙엽 따라 가 버린 사랑>을 취입한 날인 11월 10일, 많은 팬들이 병원 앞을 지키는 가운데 뇌막염으로 27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비에 있는 글 <낙엽의 뜻>은 조병화 시인이 짓고, 그의 맏형 차중경의 글씨로 새겨졌으며, 묘비의 아랫부분에는 가수 배호, 배우 허장강 등 당시 유명인들의 이름이 같이 새겨졌다.

일본행 배를 탔으나 밀항사기에 걸려 실패한 이후 서울에 돌아와 사촌형 차도균의 권유로 1963년10월에 키보이스 밴드에 합류하여 보컬로 활약한다. 미8군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큰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시민회관에서의 공연 때 가죽부츠 대신에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노래를 부른 모습은 한국의 엘비스로 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6년 11월 10일, 신세기레코드 사장의 아들 강찬호 작사에, 정민섭이 엘비스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편곡해서 만든 노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완성되었다. 키보이스는 1965년 해운대에서 한국록그룹 사상 처음으로 단독야외공연을 해 한국의 ‘비틀즈’, 혹은 ‘비치보이스’로 부리며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1967년 신세기레코드의 전속작곡가 홍현걸의 주선으로 솔로로 데뷔하였고, 같은 해 TBC(동양방송)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인 <사랑의 종말,이봉조 작곡>이 크게 히트를 쳐 연말에 동양방송 방송가요 대상 신인상을 수상, 동갑내기 배호와 함께 트로트와 팝으로 가요계를 양분하는 스타가 되었다.

1960년대 영화배우 제임스 딘, 가수 클리프 리차드가 당시 우상으로 팬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차중락은 한국가수로는 첫 번째 우상이었다.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외모, 경복고 출신의 엘리트, 20대 중반의 청분, 그리고 가슴을 파고드는 감성적 목소리는 대중의 스타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의 사후 다음 해부터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되어 그 해 가장 뛰어난 신인들에게 상이 수여 되었는데, 낙엽상 제정 첫해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이 받았으며, 1972년 제4회 때는 김세환, 이수미가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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