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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 인물

이광래
1908. 9. 29.(경상남도 마산) ~ 1968. 10. 29.
“한국 연극계의 선구자”
희곡창작·연극·연출·극단운영 등에 연극 전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함. 1949년 한국연극협회 창립자.
  • 1908
    9월 29일 경상남도 마산 출생
    1928년 배재고보 졸업
  • 1930
    일본동경고등학교 졸업
  • 1933
    일본와세다대학 영문학부 수료, 중앙일보 기자
  • 1935
    극예술연구회, 조선연극협회 입회, 조선일보기자
  • 1935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촌선생」 수석 당선
  • 1943
    제2회 국민연극경연대회 황금좌 「북해안의 흑호」 참가(이로 인해 친일명부에 오름)
  • 1945
    극단 민예 창단, 서울시 문화위원
  • 1948
    서라벌예술대학 학과장
  • 1949
    유치진과 한국연극학회 발족(간사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 1950
    극단 신협 대표
    서울시 문화위원, 신극협의회 간사장
  • 1958
    국제극예술협회 한국지부 이사
    극단 원방각 창설
  • 1962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강사, 한국연극협회 이사
  • 1963
    대한민국문화포장 수상
  • 1965
    오월문예상 연극 본상 수상
  • 1967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 1968
    10월 30일 숙환으로 별세
  • 1969
    3·1 연극상 특별상 수상
  • 1972
    유고 희곡집 『촌선생』 발간

이광래는 1908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흥근(興根)이며 호는 온재(溫齋)이다. 그는 사회사업가인 순상(舞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산토끼> 동요작가 일래(一來)의 아우이다. 1928년 배재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1930년 동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3학년으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그가 남달리 가진 고집과 자신감은 훗날 그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색채를 분명히 하는 연극을 이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와세다대학 영문과 재학 중 입센과 체홉의 작품을 읽으면서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귀국을 하게 되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68년 10월 30일 숙환으로 별세하여 11월 1일 문인, 연극인장이 예총회관 광장에서 엄수되었다. 

1940년대에는 황금좌에 관여하면서 국민연극경연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좌익계열의 단체였던 조선연극동맹에 대항, 옛 중앙무대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민족예술무대(민예)를 조직하여 반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후 신극협의회 간사장, 극단 신협 초대 대표 등을 거치면서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 중 각지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했고, 1958년에는 소극장 운동 단체인 원방각을 설립하여 그에게 처음으로 연극에 대한 동기부여를 했던 입센의 <유령>을 공연했다.

극작가, 연출가로서 뿐만 아니라, 연극학자로서 일찍이 대학연극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학연극경연대회(1948)를 실시했으며 드라마센터 개관 작업에 참가하고 서라벌예술대학 초대 연극학과 학과장, 동국대 연극학과 등에서 강의를 하며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는 연극 이론에 대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브레히트에 관해 논하였으며 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이론과 실기 양면에서 고르게 활약한 몇 안 되는 예술인이었다.

그가 참여했던 극단의 흐름을 살피자면 극예술연구회(1935)에서 중앙무대(1938), 황금좌(1940), 민족예술무대(1945), 신극협의회(1950), 신협(1950), 극협(1951), 원방각(1958)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이광래는 ‘뛰어난 연극 실험가이자 교육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수십 편의 창작 및 각색 희곡과 논문을 쓰고 여러 개의 작품을 연출하는 동안 당대로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실험을 하면서 이론을 터득했으며 이를 후학들에게 전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등장인물의 내면 의식을 중시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광래의 작품 세계는 그가 겪었던 식민지시대로부터 8.15광복ㆍ6.25한국전쟁ㆍ4.19의거 등 격동기 민중의 불행한 삶을 그리고 있다. 그는 리얼리즘 기법으로 출발해서 상업성이 강한 낭만주의로 후퇴하기도 하였고, 목적극을 쓴 바도 있으며, 6ㆍ25전쟁 후에는 표현주의극을 썼다. 그는 뮤지컬과 심포닉 드라마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기도 하였다. 특히, 표현주의ㆍ상징주의 수법을 실험하기도 하는 등 반사 실주의희곡의 개척자로 평가된다. 비사실적인 작품들은 1960년대에 들어 많이 쓰여 졌는데, <고도 있는 인간광장>, <기류의 음계>등이 있다. 이처럼 이광래는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하고 문단에 등단한 이래 30여 년 동안 희곡창작, 연극론, 연출, 극단 운영 등에 걸쳐 폭넓게 활약한 연극인이었다. 이광래는 <헬겔랜드의 해적> <맹진사댁 경사>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등 40여 편 이상의 작품을 연출했다. 대한민국문화포장(1963), 5월 문예상(1965), 예술원상(1967), 3.1연극상(1969) 등울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촌(村)선생>(현대문학사.1972)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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