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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 인물

장덕수
1894. 12. 10.(황해도 재령군) ~ 1947. 12. 2.
“동아일보의 초대 주필”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독립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해 헌신하던 중 피살됨. 1936년부터 친일행적이 오점으로 남은 언론정치인.
  • 1894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에서 출생
  • 1901
    1901년~1906년 사립연의학교(私立演義學校) 수학
  • 1907
    1907년~1912년 진남포 이사청과 평양부청의 급사로 근무
  • 1911
    독학으로 보통문관(판임관) 시험에 합격
  • 1912
    1912년~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 예과를 거쳐 정경학부 졸업
  • 1916
    상해 망명, 독립운동 투신.
  • 1918
    일경에 체포되어 하의도에 거주 제한, 신한청년단 조직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특사 파견
  • 1920
    동아일보 초대 주필 역임. 서울청년회 조직
  • 1923
    1936년까지 13년간 미국 체류. 오리건대학(신문학과) · 뉴욕 컬럼비아대학(경제학과 석사학위) · 영국 런던대학(3년간 산업정책 연구)·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제학박사 취득
  • 1937
    1월 귀국 후 동아일보 이사로 재직하면서 보성전문학교 교수 재직
  • 1938
    9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된 후 일제에 협력
  • 1940
    동아일보 폐간. 창씨개명 거부 운동
  • 1941
    비밀조직 조선독립청년당 결성하려다 피체
  • 1945
    9월 한국민주당 창당하고 외교부장 정치부장 역임하며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
  • 1947
    12월 2일 제기동 자택에서 경사 박광옥과 배희범에 의해 암살당함.

1894년 가난한 빈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겨우 끼니를 연명하는 처지였으며 정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그 뒤 진남포의 한 학교에서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진남포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황해도 해주 연희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연희보통학교 졸업 후 소년기 때 황해남도 진남포 이사청 급사로 취직하였고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제임문관시험(制任文官試驗)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판임관(判任官)에 임용되었으나, 1912년 판임관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에서는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으며 와세다 대학의 문학 강의록과 정경과 강의록으로 독학을 하였으며, 1912년 가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3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를 수료하고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신익희, 김성수, 송진우를 만났다. 이들은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대학 재학 중 장덕수는 신익희와 함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조선학회 등에서 함께 활동하며 움직였다.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간행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신익희, 윤홍섭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한인 학생회의 간부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고 웅변에 뛰어났던 그는 1915년 일본전국대학생웅변대회에 참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열변을 토해 1등을 했다. 1916년 9월 학우회 평의원이 되었다. 

1916년 7월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 직후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되라는 모교 교수의 권유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지명되어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다. 1917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여운형 등을 만났고 이후 신아동제사의 사원으로 가입, 1918년 정당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여운형·신채호·조동호·김규식·신성모·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는데 가담하였다. 1919년 2월 비밀리에 귀국하려 했으나 귀국 직후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전라 남도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했다. 1919년 11월 일본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은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여운형이 장덕수를 석방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하여 그의 도움으로 하의도를 탈출, 상하이로 갔다가 여운형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1920년 4월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동아일보의 창간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동아 일보의 초대 주필에 취임하였다. 1920년 6월 조선교육회 결성에 참여하여 평의원을 지냈다. 이어 가을 경성부에서 사회혁명당 참여, 12월 조선청년연합회 창립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가하여 이사가 되었다. 그 해 4월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노동공제회 의사(議事)에 선출되었다. 한편 그는 조선청년연합회와 서울청년연합회의 지도자로 추대된다. 그러나 1921년 '사기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공산주의 그룹으로부터 비판을받고 1922년 6월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에서 제명당했다.
그가 죽은지 37년 뒤에야 결백이 증명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장덕수는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리하여 1923년 4월에 도미 유학길에 오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단체와 선을 긋게 된다. 1923년 4월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로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이후 13년간 미국 에서 체류했다. 유학 직후 그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한국인 유학생 친목단체에 조직에 참여, 북미한국인유학생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된다. 유학생활 중 그는 허정, 이기붕, 조병옥 등을 만나 사귀었고,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서재필 등과도 만났다. 1925년 이승만등이 조직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 뒤 그는 임정 구미위원부에 수시로 출입하였다. 1934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재무부 주미(뉴욕 지부) 제5행서 재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귀국하여 1936년 동아일보 부사장을 지냈으나,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부사장직을 사퇴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를 폐간하려 했고, 장덕수는 송진우와 함께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찾아가 폐간조치를 철회해줄 것을 호소하여 폐간을 면하였다. 이후, 총독부 체제에 순응하면서 일제 전시체제에 적극적인 협력자로 친일 행적을 남겼다.

1945년 9월 송진우, 김성수, 백남훈, 허정, 백관수, 조병옥, 윤보선 등과 함께 한국 민주당의 창당 조직에 참여하였고, 이후 한민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한국민주당 외무부장에 선출되었고 1946년 한민당 정치부장이 되었다. 한민당의 정치부장으로당의 이념을 정립하는 데 공이 컸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에 미국, 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47년 5월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1947년 12월 2일 서울 제기동 자택을 방문한 배희범, 박광옥 등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입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별세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3세였다.

장덕수는 한국의 정치인, 교육자, 학자, 언론인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귀국 후 체포되어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라남도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했다. 그 뒤 임정 외무부 차장 여운형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보좌하였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으로 궁지에 몰린 이승만을 적극 도와주었다. 중일 전쟁 이전까지 합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사회계몽 운동에 힘썼으나 일제강점기 후기에 친일에 참여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며 발기인 성명서 작성을 기초하였다. 이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를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찬성과 미소공위 참가 문제를 놓고 김구, 이승만 등과 갈등하다가 제2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단정 지지 노선으로 선회했다. 1947년 12월 2일 새벽 서울특별자유시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종로경찰서 소속 현직 경찰관 박광옥, 한독당 당원인 교사 배희범 등의 총에 맞고 절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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