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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 인물

함세덕
1915. 5. 23.(인천시) ~ 1950. 6. 29.
“「동승」의 원작자”
한국 연극사의 한 축. 낭만주의적 정서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극 집필자.
  • 1915
    인천 강화 출생
  • 1929
    인천공립보통학교 졸업(출생 직후 목포에 거주 이곳에서 1년을 마침)
  • 1934
    인천상업학교 졸업(현 인천고), 서울 일한서방에서 일함
  • 1935
    동아일보에 시 「내 고향의 영혼」 둥 게재
  • 1936
    조선문단에 「산허구리」발표
  • 1939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연극대회에「도념」 출품
  • 1940
    조선일보에 「해연」으로 신춘문예 당선
  • 1941
    유치진과 함대훈이 창립한 《극단 현대극장》전속 작가
  • 1943
    「에밀레종」을 현대극장과 성보악극대 또는 반도가극단 수차례 공연
  • 1947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짙은 「태백산맥」민중·혁명·무대예술 등 합동공연
    6월 희곡집 『동승』 발간, 하반기 월북
  • 1950
    6월 29일 수류탄 오발 사고로 사망

1915년 5월 23일 아버지 함근욱과 어머니 송근식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목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다시 인천으로 이사하여 인천공립보통 학교(현재 창영초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했다. 이때 아버지는 직장을 버리고 가죽신을 만드는 일종의 제화점을 운영하였다.그의 형제는 성(聖)을 돌림자로 썼다. 함세덕은 집에서 함성달(咸聖達)로 불렀다. 함세덕의 아버지가 나주에서 근무하던 당시 강판심과 사이에서 태어난, 함세덕보다 3년 연상이다. 이복형제 모티브는 그의 작품 「해연」과 「심원의 삽화」에 등장하는 이복 남매의 모티브와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29년(15세) 인천도립상업학교(일명 북상업학교)에 입학했다. 함세덕이 5학년 되던 해 인천시립상업학교(일명 남상업학교)와 통합되어 인천상업학교가 되며 함세덕은 인천상고 20회로 졸업했다. 인상 20회 동창회 명부에는 25명의 조선인, 45명의 일본인이 함께 졸업했다. 함세덕은 왜소하여 마른 편이었으며 단아한 성격이었다. 4학년 때 졸업생 환송을 위한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당시 인천부 용동에는 영화와 악극과 연극을 공연하던 ‘애관(愛館)’이 있었다. 함세덕은 이곳에서 많은 공연을 보았다.
1933년(19세) 인천상고 5학년 때 여름방학 친구들과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부모님 허락을 얻지 못하자, 관악산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기어이 금강산으로 떠났다. 이 여행이 훗날 함세덕의 대표작 「동승」(1939)의 창작 동기가 되었다. 그는 캠핑을 좋아해 월미도 등에 놀러가 천막을 치고 며칠씩 묵고 지냈다. 「무의도 기행」과 「해연」에서 인천 부근의 섬(덕적도, 용유도, 무의도, 팔미도)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경험의 산물일 것이다. 1934년(20세) 금융계통에 취직하는 상업학교의 상례를 깨고, 일한서방(충무로)에 취직했다. 일한서방 단골손님인 삼오당 김소운을 통해 연극계 은사이며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라이벌인 유치진을 소개 받았다. 다음 해에 동아일보 동아문단에 시 세 편을 투고하여 실렸다.
「산허구리」를 1936년 조선문학에 발표하고, 1950년 불의의 수류탄 오발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활동 기간은 14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 기간 한국 연극사에 길이 남을 20여 편의 희곡을 남겼다. 친일연극과 좌익연극 사이에 표류하다 1950년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생을 마감한 작가였다.

대한민국의 극작가이다. 한국 극작가 중에서 탁월한 극작술을 지닌 작가를 꼽으라면 함세덕을 뺄 수 없다. 그의 장기인 ‘사건 구성의 정교함과 뛰어난 대사 구사력'이 어느 한 작품에서도 모자람이 없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936년 9월 「산허구리」를 조선문학에 발표하여 극작가로 데뷔했다. 1930년대 연극인들의 대표적인 경향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서양극을 접하고 졸업 후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와 자신이 배운 바를 펼쳐 보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학 경험도 없고 극단활동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직 공연관람과 독서경험만으로 안정된 극작품인 「산허구리」 발표했다. 1939년 3월 「도념」(유치진 연출, 극연좌 공연, 후일 「동승」으로 개제)으로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했다. 6월에는 「유명」이 동경 ‘축지소극장’에서 ‘동경학생예술좌’에 의해 공연 예정이었으나 “일본 내지에서는 조선말연극을 금후로 허락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로 경시천에 의해 돌연 중지 당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동승(童僧)」이 높은 평가를 받는 등 문재가 뛰어난 극작가로서 호평을 받았다. 「동승」의 원 제목은 주인공인 동자승의 이름을 딴「도념(道念)」으로, 1947년 발간된 함세덕의 희곡집 동승의 표제작이며,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1940년(26세) 1월 「해연」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1월 3일부터 2월9일에 걸쳐 연재했다. <조광> 1월호부터 4월호에 걸쳐 역사극 「낙화암」을 발표했다. 동아일보에 3월 15일부터 3월 31일까지 아동극 「닭과 아이들」을 발표했다. 연이어 「오월의 아침」, 「서글픈 재능」(후일 「추석」으로 개제), 「동어의끝」(후일 「무의도 기행」으로 개제) 등을 발표했다. 이듬 해 3월 유치진 함대훈이 창립한 현대극장에 참가하여 해방 전까지 활동했다. 8월에 「추석」이 현대극장 부설 국민연극연구소 제1회 졸업생에 의해 시연했다. 연이어 「무의도 기행」 「심원의 삽화」를 발표했다. 9월에는 「흑경정」(마르셀 파뇰의 「마리우스」와 「파니」)를 함세덕 번안, 유치진 연출로 현대극장 제2회 공연했다. 「감자와 족제비와 여교원」을 『춘추』에 게재 예정이었으나 검열로 전문 삭제 당했다. 이 작품은 희곡집 동승에 게재 되었다. 

1942년(28세)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양심적인 일본과 비인간적인 서양의 제국주의 사이의 한판 싸움을 다루어, 아시아의 해방 주체가 일본임을 선전하는 친일 성격이 담긴 「추장 이사베라」를 국민문학 3월호에 발표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극단 ‘전진좌(前進座)’에서 문예부원으로 연수 활동을 하였다. 이듬 해 4월 신라와 일본 사이의 우호적 외교관계를 선전하고 있으며, 나라의 종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아이의 목숨을 바쳐도 좋다는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에밀레 종」(서항석 연출)이 현대극장과 성보악극에 의해 합동 공연되었다. 8월에 「남풍」(「흑경정」의 개제, 허남실 연출)이 현대극장에서 공연되었다. 11월에 「황해」(「무의도 기행」을 개작, 함세덕 연출, 현대극장 공연)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했다. 1944년(30세) 3월에 「청춘」(안영일 연출)과 6월에는 국가의 멸망이라는 민족적 감정을 담고 있지만, 친일적 소지가 다분한 「낙화암」(안영일 연출)이 현대극장에서 공연되었다. 8월에는 「추장 이사베라」가 ‘성보악극단’에서 악극으로 공연됐다. 11월 에는 전쟁 수행을 위해 헌신적으로 공출에 응하는 사람의 미담을 다룬 희극물인 「거리는 쾌청한 날씨」(일어연극)를 국민문학에 발표했다.

1945년(31세) 1월 「백야」가 현대극장에서 공연되었다.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후, 9월에 박민철 황해 서일성 등과 함께 낙랑극회를 결성하였다. 11월 「산적」(실러의 「군도」를 「함세덕이 번안 연출)을 낙랑극회 제1회 공연으로 올렸다.  다음 해 4월 「기미년 3월 1일」을 낙랑극회 공연으로, 조선연극동맹 주최 제1회3.1절 기념연극대회에 출품했다. 7월에 「감자와 쪽제비와 여교원」이 조선연극동맹 주최 희곡의 밤 행사에서 낭독됐다. 1947년 1월 「감자와 쪽제비와 여교원」을 전명 개작한 「하곡」을 연극 동맹의 참가작(이서향 안영일 연출)으로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주최 제1회 종합예술제에서 공연되었다. 2월에는 「태백산맥」이 제2회 3.1절 기념 연극제에서 민중 혁명 무대예술 등의 합동공연으로 성황을 이뤘다. 지금 현재 대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4월 문학 3월호에 「고목」을 발표했다. 6월에는 희곡집 「동승을 박문출판사에서 발간했다. 후반기 제2차 전국문학자대회 이후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8년 「대통령」 발표했다. 이듬 해 「소위 대통령」을 종합 단막 희곡집 (문화희곡사)에서 발표했다. 「문학예술 12월호(1막) 1950년 1월(2막) 2월호(3막) 3월호(4막)에 걸쳐 「산사람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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