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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 인물

소파 방정환
애국장
1899.11.9.서울 ~ 1931.7.23.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 창간,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 하였으며, 어린이날을 지정함.
  • 1899
    11월9일 서울 종로구 당주동 출생
  • 1908
    소년입지회 조직
  • 1917
    손병희 선생 3녀 용화와 결혼
  • 1918
    보성전문학교 입학
  • 1919
    독립선언서 배포 체포 1주일 만에 석방
  • 1920
    일본 도쿄 도요(동양)대학 철학과 입학
  • 1921
    천도교소년회 조직(이정호,김기전 등)
  • 1922
    5월 1일 어린이날 제정
  • 1923
    3월 잡지 《어린이》 개벽사에서 창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 거행 ‘어린이날의 약속’ 전단 12만장 배포
  • 1923
    색동회 조직, 전조선소년자도자회개최(6월 9일) 및 아동예술강습회개최(7월 23일)
  • 1924
    5월 1일~4일 어린이날 기념행사
  • 1928
    세계아동예술전람회 개최(20개국 참가)
  • 1931
    7월 23일 경성제대병원에서 소천. 홍제동 납골당 안장
  • 1936
    7월 23일 망우리공원으로 이장
  • 1940
    『소파전집』 간행
  • 1957
    소파상(小波賞) 제정
  • 1978
    금관문화훈장
  • 1980
    건국포장 추서
  • 1990
    건국 애국장으로 승급 추서
  • 2017
    묘역 국가등록문화재 지정

1899년 서울 종로구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크게 경영하던 상인의 집에서 출생하여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1905년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혔다.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결혼하였다. 1931년 7월 23일 잡지의 발행·편집, 동화 구연과 소년문제 강연회 및 집필 중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개벽사의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좌우 분열 등 과로와 스트레스, 비만으로 건강이 나빠진 방정환은 누적된 피로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부속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문간에 검은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1915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한다. 손병희가 교주로 있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천도교청년회의 핵심 활동가로 부각되었고 그 무렵 청년 단체인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문예지 <신청년, 1919~1920>을 편집 발행해 청년 운동가이자 문학가로서 열성을 보였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보성전문학교 교장 윤익선이 천도교 보성사에서 인쇄한 조선독립신문을 내다 체포되자 직접 등사기로 찍은 조선독립신문 2호를 찍어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20년 9월 개벽사 도쿄부 특파원이자 천도교청년회 도쿄 지회장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며 1921년 4월 도요 대학에 신설된 문화학과에 보통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철학과 신문화, 아동문학, 아동심리학 등을 공부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1922년 7월 개벽사에서 출판한 번역동화집 <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 있을 때 출판한 유일한 단행본이며,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사랑의 선물>을 만든 이유는 당시 조선의 어린이들이 누릴 만한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23년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였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형제별〉등의 동요·동화·모험 탐정소설인<칠칠단의 비밀>등의 소년 소설·동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 1928년에는 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기도 하였다. 

1921년 서울에서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족적 독립(해방)을 주창하며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 했는데, 강연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고,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3년 3월 20일,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 1934년 발간 중지>를 창간 하였다. <어린이>는 색동회의 동인이었던 마해송, 고한승, 정순철, 윤극영뿐 아니라 독자였던 이원수, 윤석중, 윤복진, 최순애 등이 작품을 투고하면서 이후 아동 문학가로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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