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3월 10일 충청남도 대전에서 출생하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1921년 사회주의 운동가인 김사국을 만나 결혼했다. 쉴새없이 사회운동에 매진하다가 1928년 1월 5일 질병으로 별세하였으며, 1월 10일에 치러진 장례식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거행되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유해는 남편 김사국이 묻혀있던 망우리공원에 안장되었었으나,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면서 2002년 부부가 함께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망우리공원에는 시어머니(남편 김사국의 모친, 안국당)의 묘역앞에 김사국, 박원희 부부의 비석이 남아있다.
1923년 남편 김사국이 일제경찰에 수배되자 부부는 함께 북간도로 이주하고 용정촌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기도 한다. 김사국과 박원희의 조직활동이 포착되면서 1923년 7월 일제경찰에 체포되었고, 임신중이던 박원희는 같은 해 9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4년 귀국하여 남편과 함께 조선청년총동맹 등 사회단체와 여성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해 4월 딸을 출산했는데 딸의 이름조차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뜻의 ‘사건(史建)’으로 지었다.) 1924년 5월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0월에는 고려공산동맹에도 가입했다.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부인의 독립과 자유와 모성보호의 실현을 도모하는 조선의 딸들아, 굳세게 뭉치자"고 호소하였다.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1927년 4월 중앙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했다. 5월에는 당시 여성운동가가 총망라된 근우회를 조직하고자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다.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 계몽강연을 하며 각 지방을 순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