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교육활동과 일제 강점기 조선의 고서적, 역사에 대한 연구 등을 했다. 그는 정인보, 안재홍과 함께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1908년 일본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 후 평양, 서울 등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최남선이 운영하던 광문회에 관여하였다. 1911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1912년 중국에서 신규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1919년 종로 보신각에서 독립의 '애원서'를 낭독하여 옥고를 치른 후 중동, 중앙, 송도, 배재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1933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이 되어 평이한 역사 서술을 통한 민중계몽에 힘을 기울였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17년 묘역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언론인으로 민족의식, 민족문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민중·언론·혁명아·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중동·중앙·배재· 송도 등의 학교에서 교육 활동을 했다. 조선일보·중외일보·개벽 등에 글을 쓰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이 되면서부터 언론을 통한 역사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우리 역사 속에서 민족문화 또는 민족정신을 찾아 널리 보급하려 했던 노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역사 연구는 주로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신적·내면적 침략이 갈수록 심화되어 국학 연구가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강조했다. 역사적 사실의 근원적 연구보다는 역사성의 부여에 관심을 두었다. 역사적 지식의 정리와 의미의 보급에 더 힘을 쏟았다. 그의 연구물은 대개 이때 신문을 통해서 발표됐고, <호암전집>으로서 집대성됐다. 그의 역사연구는 민족사학의 역사인식의 입장에서 행해졌으며, 민족사학의 한국역사 체계화를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서 수행됐다.
그의 역사의식이나 역사학은 신채호의 주장에서 출발하고 단재사학이 제시한 문제의 한 끝을 구체적인 작업으로서 개척한 것이다. 그의 역사연구의 기본 목표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우리 처지, 사회내부 모순관계를 반역아를 통해서 찾아봄으로써 사회 발전의 계기를 찾으려 한 것이다. 나의 생장 발달 상태를 사상·문화·예술·풍속 속에서 찾고 거기에서 민족문화 또는 민족정신을 소생시키려 한 점이다. 그는 '조선 심' 또는 '조선 사상'을 강조했다. 조선 글은 조선 심에서 생겨난 결정인 동시에 조선학을 길러주는 비료라 하려니와 조선 글이 된 이래 9세기 동안에 조선의 사상계는 지는 듯 조는 듯 조선학 수립에 대하여 각별한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차차 낡은 사상에서 벗어나 새 사상의 자극을 받게 된 조선인은 조선을 재인식할 때가 왔다.
그의 학문은 첫째, 분야의 다양성이다. 둘째, 논술의 제목 자체가 서술성을 지니고 있다. 셋째, 거의가 단문으로 이루어졌다. 넷째, 평이한 문체이다. 다섯째 지극히 객관적인 논조 위에서 민족적 긍지를 고양시켰다. 여섯째, 민족사 중에서도 대외관계사, 특히 근세외교사연구에 힘을 쏟았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민중 우선, 실리 우선의 정신을 지녀야 할 것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최선의 외교자세를 타산성과 실리를 우선으로 했다는 점에서 문일평의 사학정신은 순수성보다는 강한 현실성을 띠고 있다. 과거사 비판을 통한 독특한 역사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재구성해 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 민족사에 대한 반성과 민족혼의 발굴을 궁극적 목표로 하면서도, 과대와 부회, 독단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망우리공원 정상 부근에 있는 문일평의 묘소 주변에는 오세창, 방정환 등의 묘소가 있다. 가족들이 대부분 월북한 탓에 1995년이 되어서야 독립장 서훈을 받은 문일평의 묘비에는 조선일보 대기자를 지낸 후배 이규태가 다소 길지만 국학의 대가를 가장 짧게 정리한 명문이 있어 둘러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