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인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안흥국의 셋째아들이다. 부인은 이혜련이며, 자녀로는 안필립, 안필선, 안수산, 안수라, 안필영이 있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배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상경하여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 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죽은 뒤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1973년 11월 미국에 있던 부인 이혜련의 유해와 함께 강남 도산공원 안장되었고 비석은 다시 망우리로 돌아와 안창호 선생의 묘터를 지키고 있다.
안창호의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하여 민족혁신을 이룩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민족혁신은 자아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자아혁신은 바로 인격혁신이라 보았다. 개개인의 인격혁명으로서의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이며 자기개조가 곧 민족개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는 주인정신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윤치호·이승만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했다. 점진적으로 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기른다는 교육목표를 정했으며, 초등과정의 남녀공학을 실시했다.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05년 4월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했다. 여기에서 야학을 개설,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공립신보를 발행하여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에 힘썼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듬해에 귀국했다. 귀국 후 1907년에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했다. 이어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서관을 건립했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를 열었다. 청도회의는 북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영농과 군사양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하였으며, 이에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하여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대성학교·신민회·청년학우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출됐다.
1915년 6월 2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에 취임하며 동포의 단결을 강조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했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했다.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사업을 추진했다. 1927년 길림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경찰에 감금됐다가 중국 내 사회여론이 비등하게 되어 20일만에 석방됐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이동녕·이시영·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를 제창했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난징에서 토지를 매입했다. 1932년 일본의 중국본토침략정책에 대응하여 독립운동근거지 건설계획을 재검토하던 중, 같은 해 4월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됐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 송태산장에서 은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