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8월 21일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하여 1928년 4월 신간회 배천지회 설립대회 당시 준비위원으로 홍세혁 등과 함께 격문을 배포하려다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29년 1월 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에 가입했다가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하여 한인들에게 격문을 반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또한 구연흠, 조봉암 등과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청년반제상한인청년동맹을 결성한다.
1931년 6월 김단야로부터 국내 김형선과 협력하여 적색노동조합과 조선공산당 재건 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동년 7월 경성에서 김형선을 만나 함남 진남포에서 활동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1932년 10월 진남포에서 한국형, 심인택 등과 적색노동조합부두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한다. 이외에도 진남포상공학교 적색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평양에서는 면옥노동자총파업을 선동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다.
1933년 다시 상하이로 이동하여 코민테른 원동부에 상황을 보고한다.
1934년 4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국내 경기도경찰부로 압송된다. 동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중병을 얻어 1936년 6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37년 8월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그의 묘역은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28년 4월 16일 신간회 배천지회(白川支會) 설립대회 당시 준비위원으로 홍세혁 등과 함께 격문을 배부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人獨立運動者同盟)을 결성하여 민족운동 기념일마다 재류한인들에게 격문을 반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받고 서매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 순국하신 독립 운동가이다.